2025년 경주에 세계 최초 왕릉 뷰 미술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경주를 자주 갔던 저로서는 이 소식이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고분이 따분한 역사 유적에서 현대 미술의 배경이 된다는 발상 자체가, 경주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오아르 미술관, 왕릉 옆에 미술관이 생겼다는 것의 의미
솔직히 말하면, 저는 초등학교 소풍 때마다 경주를 갔습니다. 그때 경주 여행은 박물관에서 왕관 보고, 왕릉 무덤 앞에서 선생님 설명 듣고 끝나는 코스였습니다. 역사 답사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그냥 따분한 하루였습니다. 그런 기억이 있는 저한테 오아르 미술관 소식은 꽤 반가웠습니다.
오아르 미술관은 2025년 4월 1일 개관한 현대 미술관으로, 건축가 유연준이 설계했습니다. 신라 고분군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고, 건물 자체가 고분의 곡선을 따라 설계되어 외관부터 주변 경관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집니다. 루프탑(rooftop), 즉 건물 옥상 관람 구역에 올라가면 고분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조인데, 이게 단순한 전망대가 아니라 전시 동선의 일부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건물과 자연 지형이 통합된 이 방식을 건축 용어로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Landscape Architecture)라고 합니다.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란 건축물이 주변 자연환경과 분리되지 않고 지형과 유기적으로 결합되도록 설계하는 건축 방식입니다. 그냥 건물이 하나 들어선 게 아니라, 고분이라는 풍경 자체를 전시의 일부로 끌어들인 셈입니다.
현재 진행 중인 소장품 기획전 '잠시 더 행복하다'에서는 단색화부터 국내외 동시대 회화까지 49점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단색화(Dansaekhwa)란 1970년대 한국에서 발생한 미술 운동으로, 하나의 색조를 반복적으로 쌓아 올려 행위와 물성 자체를 작품으로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지하 전시 공간에서는 아티스트 듀오 문경원·전준호의 몰입형 설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데, 기후 변화와 환경 위기를 인간이 아닌 존재의 시선으로 재구성한 미디어 아트입니다.
금리단길, 제가 직접 끝에서 끝까지 걸어본 거리
경주 금리단길을 처음 들었을 때, 솔직히 '이태원 경리단길 같은 거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걸어보니 좀 달랐습니다. 단순히 트렌디한 상권이 아니라, 구도심의 결이 살아 있는 채로 새로운 가게들이 자리를 잡은 느낌이었습니다. 봉황대 같은 유적지와 바로 연결되고, 공영 주차장에서 도보 몇 분이면 닿는 접근성도 좋았습니다.
2025년 금리단길에 새로 문을 연 공간들 중 특히 인상적인 곳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와츠녹: 식물과 오브제를 다루는 녹색 식물 연구소. 식물 식재 클래스와 이끼 식재 클래스를 운영하며, 완성한 식물이 여행 기념품이 된다.
- 치키차카초코: 금리단길 중심 상권의 디저트 카페. 코르네 파이와 찰개빵이 시그니처 메뉴이며, 포장 패키지가 선물용으로 인기다.
- 연경: 100% 예약제로 운영되는 비누·샴푸 체험 공간. 식물성 오일 기반 재료로 나만의 향과 색을 직접 조합해 만든다.
- 브런치 바이트: 봉황대를 바라보며 브런치를 먹을 수 있는 빈티지 감성 카페. 풍기 크림 파스타와 더치 베이비가 대표 메뉴.
- 더 오늘: 25년 경력 사장님이 직접 조리하는 오므라이스·우동 전문점. 회오리 오므라이스와 치즈 떡볶이 가락국수가 메인이다.
제가 가장 최근에 금리단길을 갔을 때 느꼈던 것은, 이 거리가 단순히 구경하는 곳이 아니라 시간을 보내는 곳이 됐다는 점입니다. 예쁜 굿즈를 파는 가게들을 기웃거리고, 한복 대여점에서 한복을 빌려 입고 거리를 걸으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제 경험상 한복을 입고 금리단길을 걷는 것은 꼭 한 번은 해볼 만합니다. 유적지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결과물이 나옵니다.
플래시백 계림이 특별한 이유, 숫자로 봤습니다
플래시백 계림은 2023년 11월 개관한 몰입형 히스토리텔링 전시관으로, 보문 관광단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총 1,700평 규모에 13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숫자로만 보면 큰 실내 전시 공간이구나 싶지만, 실제 경험은 꽤 다릅니다.
여기서 핵심 개념이 몰입형 히스토리텔링(Immersive Historytelling)입니다. 몰입형 히스토리텔링이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초대형 프로젝션과 고해상도 미디어, 공간 전체를 감싸는 사운드를 결합하여 관람객이 역사의 흐름 속에 직접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전시 방식입니다. 이 방식이 기존 박물관 전시와 구별되는 핵심 차별점입니다.
전시는 현대의 시간, 신라의 신화적 시간, 기억의 시간이라는 세 축으로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단순히 연대순으로 역사를 나열하지 않는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저는 어릴 때 경주 박물관에서 유리 케이스 안에 전시된 유물을 보며 '이게 왜 중요한 건지 모르겠다'고 느꼈던 기억이 있는데, 플래시백 계림은 그 문제를 정반대 방향으로 풀었습니다. 유물 대신 빛과 사운드로 신화를 재구성해서, 역사에 관심 없는 사람도 감각적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최근 경주는 MZ세대를 중심으로 재방문 선호도가 높은 여행지로 떠오르고 있으며, 전통과 현대 콘텐츠의 결합이 주요 요인으로 분석됩니다(출처: 한국관광공사). 플래시백 계림이 이 흐름의 중심에 있는 공간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실 경주는 오랫동안 '한 번쯤 가야 하지만 두 번은 안 가도 되는 곳'이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저도 성인이 되고 다시 경주를 갔을 때 그 인식이 얼마나 틀렸는지 직접 확인했습니다. 낮에는 유적지와 카페를, 밤에는 조명으로 분위기가 바뀐 거리를 걷는 경험은 어릴 때 기억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런 변화를 도시 재생(Urban Regeneration)의 맥락에서 보면 더 잘 이해됩니다. 도시 재생이란 낙후되거나 기능이 약화된 도심을 물리적 재건 없이 문화·상업 콘텐츠를 통해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정책적 접근을 말합니다. 금리단길이 구도심 기반의 로컬 상권을 유지하면서 신상 매장들을 받아들인 방식, 오아르 미술관이 새로운 건물을 짓되 고분 풍경을 해치지 않는 방향으로 설계된 방식, 이 모두가 도시 재생의 원칙과 맞닿아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 자료에 따르면 경주는 국내 역사문화도시 중 방문자 만족도가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으며, 특히 체험형 콘텐츠와 먹거리 인프라가 확충된 이후 체류 시간이 증가하는 추세입니다(출처: 문화체육관광부). 제가 금리단길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끝에서 끝까지 걸었던 경험이 정확히 이 통계와 겹칩니다.
오아르 미술관과 플래시백 계림, 금리단길의 새 공간들은 각각 따로 봐도 의미 있지만, 세 곳을 하루 동선으로 묶으면 경주의 어제와 오늘을 한꺼번에 경험하는 여행이 됩니다. 경주가 따분한 역사 답사지라는 인식은 이제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직접 가보면 알게 됩니다.